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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 침공 / 긴급 분노 작전 Ruinas Invasion of Constantinople La invasión de Constantinopole (Operation Urgent Fur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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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69년 5월 8일 ~ 1970년 10월 12일 | ||
장소 | ||
콘스탄티노폴 전역 | ||
결과 | ||
루이나의 승리 콘스탄티노폴 수비군 무장해제 콘스탄티노폴 정부의 붕괴 루이나의 보호령으로 편입 | ||
병력 | ||
루이나군 51,300명 | 콘스탄티노폴 수비군 1200명 | |
피해규모 | ||
루이나군 1명 전사 16명 부상 | 콘스탄티노폴 수비군 980명 전사 115명 부상 | |
1. 개요 [편집]
2. 침공의 배경 [편집]
빌베른의 식민지배를 받던 랜드해협의 소국가인 콘스탄티노폴은 지배국이던 빌베른이 약화한 1940년대 이후로 독자적인 공화국가를 구성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 공화정이 구성되었으나, 후에 수상이 된 에우프로야 스타투드라(1902 ~1959)는 정치깡패 사병인 서번트 갱과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잔혹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과의 유착이 있었기에 실업율과 빈곤율이 상승하면서 대중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이런 불만이 가중되던 와중에 1959년 자유와 복지, 교육 등을 외치며 일어난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을 중심으로 한 무력 쿠데타가 일어나 스타투드라의 독재정권은 비밀경찰과 군, 갱단과 함께 무너졌고 신보석운동을 이끌었던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이 새 수상으로 취임하여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고 상공회의소 건립과 복지, 교육, 관광산업 등을 추진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근대화 사업에 착수했다.
주변 국가들은 혁명을 위법이라고 보고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실질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국가들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 두 국가뿐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가 체르드 공화국 정부를 비난하는 등 체르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라 마베라에서 좌파 정권이 전복되는 등 콘스탄티노폴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 와중에 부수상이었던 버나드 코드는 지속적으로 수상인 모리스 비숍을 압박하며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강화하기를 요구했다.
이렇게 내부적 사정이 좋아지지 않던 중, 인민 혁명정부는 결국 내부 결집을 강화하기 위하여,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헀다. 결국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는 모든 외국인의 재산을 몰수하게 되었다. 루이나는 특히 콘스탄티노폴의 관광 산업과 광물 자원 개발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이는 에우프로야 스타투드라 정권 시기부터 이어진 관계였다. 그러나 모리스 비숍 정부가 외국 자본을 "구시대의 착취 도구"로 규정하고 강도 높은 국유화 정책과 외자 철수 압박을 시작하자 루이나의 대기업들과 정치권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1969년 4월 13일 모리스 비숍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 수상이 급진적 레닌주의자였던 버나드 코드(Bernard Coard) 부수상을 지지하던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 혁명정부 인민군 사령관에 의해 감금당했다. 루이나는 10월 15일 비숍 수상의 구출을 체르드 정부에 의뢰했지만, 19일 비숍 수상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내전이 발생하여 그 와중에 도주하던 비숍 수상과 각료들이 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버나드 코드 부수상과 허드슨 오스틴 사령관은 혁명군사 평의회 정부를 수립하고 폴 스쿤(Paul Scoon) 콘스탄티노폴 국회의장을 투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일에는 루이나 정부는 특별상황팀을 편성하여 콘스탄티노폴 침공계획을 수립해 리처드 잭슨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잭슨 대통령도 이를 승인하면서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돌입했다.
한편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열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도 폴 스쿤 콘스탄티노폴 국회의장의 감독과 지회 하에서 민주적인 총선거와 콘스탄티노폴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건에는 의견들이 일치했지만 각국의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주장한 LSEC 국가들에 대하여 사비에트,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은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사비에트의 강력한 반대로 회의는 결렬됐다.
결국 5월 8일 오전 5시 루이나는 사전 선전포고 없이 사비에트와 소련이 직접 개입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콘스탄티노폴을 침공하였다.
이런 불만이 가중되던 와중에 1959년 자유와 복지, 교육 등을 외치며 일어난 신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을 중심으로 한 무력 쿠데타가 일어나 스타투드라의 독재정권은 비밀경찰과 군, 갱단과 함께 무너졌고 신보석운동을 이끌었던 모리스 비숍(Maurice Bishop)이 새 수상으로 취임하여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고 상공회의소 건립과 복지, 교육, 관광산업 등을 추진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근대화 사업에 착수했다.
주변 국가들은 혁명을 위법이라고 보고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실질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국가들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 두 국가뿐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가 체르드 공화국 정부를 비난하는 등 체르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라 마베라에서 좌파 정권이 전복되는 등 콘스탄티노폴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 와중에 부수상이었던 버나드 코드는 지속적으로 수상인 모리스 비숍을 압박하며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강화하기를 요구했다.
이렇게 내부적 사정이 좋아지지 않던 중, 인민 혁명정부는 결국 내부 결집을 강화하기 위하여,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헀다. 결국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는 모든 외국인의 재산을 몰수하게 되었다. 루이나는 특히 콘스탄티노폴의 관광 산업과 광물 자원 개발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이는 에우프로야 스타투드라 정권 시기부터 이어진 관계였다. 그러나 모리스 비숍 정부가 외국 자본을 "구시대의 착취 도구"로 규정하고 강도 높은 국유화 정책과 외자 철수 압박을 시작하자 루이나의 대기업들과 정치권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1969년 4월 13일 모리스 비숍 콘스탄티노폴 인민 혁명정부 수상이 급진적 레닌주의자였던 버나드 코드(Bernard Coard) 부수상을 지지하던 허드슨 오스틴(Hudson Austin) 혁명정부 인민군 사령관에 의해 감금당했다. 루이나는 10월 15일 비숍 수상의 구출을 체르드 정부에 의뢰했지만, 19일 비숍 수상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내전이 발생하여 그 와중에 도주하던 비숍 수상과 각료들이 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버나드 코드 부수상과 허드슨 오스틴 사령관은 혁명군사 평의회 정부를 수립하고 폴 스쿤(Paul Scoon) 콘스탄티노폴 국회의장을 투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일에는 루이나 정부는 특별상황팀을 편성하여 콘스탄티노폴 침공계획을 수립해 리처드 잭슨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잭슨 대통령도 이를 승인하면서 루이나는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돌입했다.
한편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열린 랜드해협 공동체의 긴급회의도 폴 스쿤 콘스탄티노폴 국회의장의 감독과 지회 하에서 민주적인 총선거와 콘스탄티노폴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건에는 의견들이 일치했지만 각국의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주장한 LSEC 국가들에 대하여 사비에트,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은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사비에트의 강력한 반대로 회의는 결렬됐다.
결국 5월 8일 오전 5시 루이나는 사전 선전포고 없이 사비에트와 소련이 직접 개입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콘스탄티노폴을 침공하였다.
3. 전개 [편집]
4. 전쟁 시작과 승리 [편집]
긴급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이라고 명명된 이 작전은 루이나가 참여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조셉 맥클리프와 노먼 슈워츠코프를 지휘관으로 한 51,300명의 루이나 해병대, 제82공수사단, 육군 레인저와 델타 포스, 네이비 씰, 그린베레 등이 선두로 콘스탄티노폴에 공수, 상륙, 침투했고 이 뒤를 따라 보병연대와 공병대대가 상륙했다. 루이나 해군과 루이나 공군도 이를 지원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은 정규군 1300여명뿐이었다.
5월 8일일 자정 제75레인저연대 1대대의 A중대와 B중대는 포인트 세리네스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C-130 수송기로 강습했다. 해당 항구는 사비에트군이 상륙할 수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강습에 성공한 레인저 대원들은 AC-130의 지원을 받아 M67 무반동포로 콘스탄티노폴군의 대공포와 장갑차들을 제압하고 오전 10시 경 비행장을 완전히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항구로 제82공수사단 병력, 루이나군 325보병 연대 병력들이 추가로 증원되었다. 오후 3시 30분 경 콘스탄티노폴 장갑차 세 대가 항구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가했지만 루이나군의 무반동포와 AC-130에 의해 전부 격파되어 버렸다.
레인저 병력들이 세리네스 항구를 강습하던 동시간에 SEAL 4팀은 콘스탄티노폴군 순찰선 몰래 북부 해변에 상륙했고 해당 해변이 강습에 부적합하다는 정보를 습득했다. 5월 16일 새벽 5시 30분 경 루이나 해병대 8연대 2대대 병력들은 CH-47과 UH-1 헬기들에 탑승한 채로 북부 해변에 강습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수비군은 DShK 중기관총으로 저항했지만 AH-1 공격헬기의 공격에 격파되어 버렸다.
한편, 5월 17일 새벽 '콘스탄티노폴 자유라디오' 방송국(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원격 송신탑이었다) 확보 임무를 맡은 SEAL 6팀 대원들이 루이나 육군의 UH-1 헬리콥터로 침투하여 방송국을 점령했다. 본래는 구출한 폴 스쿤 국회의장을 방송국으로 데리고 와서 콘스탄티노폴 군에 대한 선전 방송을 할 의도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스쿤 의장 구출 작전 자체도 굉장히 힘들어진 판에다, 방송국 점령 팀은 겨우 1개 소대(SEAL 팀 1개 소대의 정원은 14명)에 불과해서 BTR-60 장갑차를 동원한 콘스탄티노폴군의 반격을 받고 결국 방송 장비를 파괴한 후 황급히 퇴출했다. 그 와중에도 전사자는 1명도 없었다.
델타 포스 병력들과 제75레인저연대 C중대 병력들은 UH-1 헬리콥터와 AH-1 헬리콥터를 동원해 힐 교도소에 수감된 콘스탄티노폴 정치범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비군 대공포에 UH-1 헬리콥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한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SEAL은 폴 스쿤 의장 구출과 통신기지 파괴 등의 특수작전을 실행했다. 임무 자체는 모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삽질들이 있었다. 작전이 개시되기 전인 23일 'SEAL 6팀' 중 1개 팀과 공군 공정관제사(CCT)는 1차 침투 당시 그냥 구축함에서 보트로 옮겨타고 상륙해도 되는데 굳이 해상 공수강하를 하다가 폭풍우 속 높은 파도에 SEAL 6팀 대원 4명이 부상당했고 남은 대원들이 작전을 지속하려 했으나 침투용 보트가 파도에 휩쓸려 버려서 결국 임무 자체가 취소되었다. 다른 팀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작전 첫 날인 25일 의장 관저에 헬리콥터로 침투하던 SEAL 팀은 콘스탄티노폴군의 대공포 사격으로 혼란이 생겨 위성통신 장비인 SATCOM을 헬리콥터에 두고 내렸다. 장갑차를 동원한 수비군에 포위되어 교전하던 SEAL 팀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근접항공지원에 의지하며 24시간 동안 고립되어 있었는데 일반 무전기도 금세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SEAL 팀을 지원하던 루이나 공군의 AC-130 건쉽과 교신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한 대원이 혹시나 하고 관저의 일반 전화로 통신을 시도해 봤는데 다행스럽게도 일반 전화망은 살아 있었다. 수비군이 깜빡하고 의장 관저의 전화선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국제전화는 유료인지라 교환원이 그 와중에 "결제는 뭘로 하실래요?"라고 물었고 대원의 개인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루이나 포트 브래그에 있는 합동특수작전사령부(JSOC)와의 통화에 성공하여 통화 중계를 통해 관저 상공의 AC-130 항공기와 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지원나온 루이나 해병대의 AH-1T 시 코브라 공격 헬리콥터 2대와 루이나 육군의 UH-1 휴이 헬리콥터 1대가 수비군의 ZU-23-2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자 중 5명이 부상당했다. 이외에도 루이나 해병대의 LVTP-7 상륙장갑차들과 M60 패튼 전차 4대가 상륙해서 해당 작전을 지원했는데 전차가 한 대도 없던 콘스탄티노폴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BTR-60 장갑차 한 대가 루이나군의 전차에 의해 격파당하고 항구도 점령당했다.
이외에도 루이나군의 삽질이 계속되었는데 국가안전보장국(NSA)에조차 정보요구를 하지 않아서 때때로 1895년에 작성된 지도나 상업용 관광지도로 작업하는 등 내부적 정보교환이 원활하지 않은 그야말로 비밀 작전이었기 때문에 해군 A-7 전폭기는 애꿎은 정신병원을 박살내 환자 18명이 사망했다.
5월 26일 아침 수비군은 루이나군 325보병 연대 2대대의 순찰대를 매복공격했고 루이나군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루이나군은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수비군의 주요 주둔지를 포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루이나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 콘스탄티노폴군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결국 오전 8시 30분에 항복하게 되었다. 수비군의 항복 이후 루이나군은 콘스탄티노폴군의 막대한 무기가 저장된 무기고를 접수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단 2주만에 콘스탄티노폴 정부가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폴 전쟁도 끝나는 줄 알았고, 콘스탄티노폴에도 평화와 자유로운 민주주의가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조셉 맥클리프와 노먼 슈워츠코프를 지휘관으로 한 51,300명의 루이나 해병대, 제82공수사단, 육군 레인저와 델타 포스, 네이비 씰, 그린베레 등이 선두로 콘스탄티노폴에 공수, 상륙, 침투했고 이 뒤를 따라 보병연대와 공병대대가 상륙했다. 루이나 해군과 루이나 공군도 이를 지원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은 정규군 1300여명뿐이었다.
5월 8일일 자정 제75레인저연대 1대대의 A중대와 B중대는 포인트 세리네스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C-130 수송기로 강습했다. 해당 항구는 사비에트군이 상륙할 수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강습에 성공한 레인저 대원들은 AC-130의 지원을 받아 M67 무반동포로 콘스탄티노폴군의 대공포와 장갑차들을 제압하고 오전 10시 경 비행장을 완전히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항구로 제82공수사단 병력, 루이나군 325보병 연대 병력들이 추가로 증원되었다. 오후 3시 30분 경 콘스탄티노폴 장갑차 세 대가 항구를 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가했지만 루이나군의 무반동포와 AC-130에 의해 전부 격파되어 버렸다.
레인저 병력들이 세리네스 항구를 강습하던 동시간에 SEAL 4팀은 콘스탄티노폴군 순찰선 몰래 북부 해변에 상륙했고 해당 해변이 강습에 부적합하다는 정보를 습득했다. 5월 16일 새벽 5시 30분 경 루이나 해병대 8연대 2대대 병력들은 CH-47과 UH-1 헬기들에 탑승한 채로 북부 해변에 강습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수비군은 DShK 중기관총으로 저항했지만 AH-1 공격헬기의 공격에 격파되어 버렸다.
한편, 5월 17일 새벽 '콘스탄티노폴 자유라디오' 방송국(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원격 송신탑이었다) 확보 임무를 맡은 SEAL 6팀 대원들이 루이나 육군의 UH-1 헬리콥터로 침투하여 방송국을 점령했다. 본래는 구출한 폴 스쿤 국회의장을 방송국으로 데리고 와서 콘스탄티노폴 군에 대한 선전 방송을 할 의도였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스쿤 의장 구출 작전 자체도 굉장히 힘들어진 판에다, 방송국 점령 팀은 겨우 1개 소대(SEAL 팀 1개 소대의 정원은 14명)에 불과해서 BTR-60 장갑차를 동원한 콘스탄티노폴군의 반격을 받고 결국 방송 장비를 파괴한 후 황급히 퇴출했다. 그 와중에도 전사자는 1명도 없었다.
델타 포스 병력들과 제75레인저연대 C중대 병력들은 UH-1 헬리콥터와 AH-1 헬리콥터를 동원해 힐 교도소에 수감된 콘스탄티노폴 정치범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비군 대공포에 UH-1 헬리콥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한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SEAL은 폴 스쿤 의장 구출과 통신기지 파괴 등의 특수작전을 실행했다. 임무 자체는 모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삽질들이 있었다. 작전이 개시되기 전인 23일 'SEAL 6팀' 중 1개 팀과 공군 공정관제사(CCT)는 1차 침투 당시 그냥 구축함에서 보트로 옮겨타고 상륙해도 되는데 굳이 해상 공수강하를 하다가 폭풍우 속 높은 파도에 SEAL 6팀 대원 4명이 부상당했고 남은 대원들이 작전을 지속하려 했으나 침투용 보트가 파도에 휩쓸려 버려서 결국 임무 자체가 취소되었다. 다른 팀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작전 첫 날인 25일 의장 관저에 헬리콥터로 침투하던 SEAL 팀은 콘스탄티노폴군의 대공포 사격으로 혼란이 생겨 위성통신 장비인 SATCOM을 헬리콥터에 두고 내렸다. 장갑차를 동원한 수비군에 포위되어 교전하던 SEAL 팀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근접항공지원에 의지하며 24시간 동안 고립되어 있었는데 일반 무전기도 금세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SEAL 팀을 지원하던 루이나 공군의 AC-130 건쉽과 교신을 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한 대원이 혹시나 하고 관저의 일반 전화로 통신을 시도해 봤는데 다행스럽게도 일반 전화망은 살아 있었다. 수비군이 깜빡하고 의장 관저의 전화선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국제전화는 유료인지라 교환원이 그 와중에 "결제는 뭘로 하실래요?"라고 물었고 대원의 개인 신용카드를 이용해서 루이나 포트 브래그에 있는 합동특수작전사령부(JSOC)와의 통화에 성공하여 통화 중계를 통해 관저 상공의 AC-130 항공기와 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지원나온 루이나 해병대의 AH-1T 시 코브라 공격 헬리콥터 2대와 루이나 육군의 UH-1 휴이 헬리콥터 1대가 수비군의 ZU-23-2 대공포에 격추되어 탑승자 중 5명이 부상당했다. 이외에도 루이나 해병대의 LVTP-7 상륙장갑차들과 M60 패튼 전차 4대가 상륙해서 해당 작전을 지원했는데 전차가 한 대도 없던 콘스탄티노폴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BTR-60 장갑차 한 대가 루이나군의 전차에 의해 격파당하고 항구도 점령당했다.
이외에도 루이나군의 삽질이 계속되었는데 국가안전보장국(NSA)에조차 정보요구를 하지 않아서 때때로 1895년에 작성된 지도나 상업용 관광지도로 작업하는 등 내부적 정보교환이 원활하지 않은 그야말로 비밀 작전이었기 때문에 해군 A-7 전폭기는 애꿎은 정신병원을 박살내 환자 18명이 사망했다.
5월 26일 아침 수비군은 루이나군 325보병 연대 2대대의 순찰대를 매복공격했고 루이나군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루이나군은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수비군의 주요 주둔지를 포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루이나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던 콘스탄티노폴군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결국 오전 8시 30분에 항복하게 되었다. 수비군의 항복 이후 루이나군은 콘스탄티노폴군의 막대한 무기가 저장된 무기고를 접수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단 2주만에 콘스탄티노폴 정부가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폴 전쟁도 끝나는 줄 알았고, 콘스탄티노폴에도 평화와 자유로운 민주주의가 올 줄 알았다. 그러나…
4.1. 붕괴 후 혼란기 [편집]
1969년 6월에 콘스탄티노폴 수상 관저가 함락되면서 전쟁 종전 선언을 했지만, 기동전 위주로 했기에 병력이 뒷수습하기엔 한없이 모자랐고 현지의 생활을 완전히 무시한 막장 전후 처리로 인해 저항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으로 국경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온갖 곳에서 듣도 보도 못한 범죄자와 깡패, 무장세력이 콘스탄티노폴로 기어들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일개 유고랜드 갱스터였던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끌던 유일신과 성전이 있다. 저 멀리 중동에서 알카에다도 지하디스트 양성에 딱 좋은 환경에 군침을 흘리며 그들과 연계된 온갖 단체들을 콘스탄티노폴에 침투시켰다. 이들이 바로 ISIL의 전신이다. 이들은 반루이나 저항 뿐만 아니라, 각 세력을 충돌시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도록 했다. 그래서 루이나는 그들과도 싸워야만 했고 매년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상황에서 원래 콘스탄티노폴에 살던 이들도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루이나군의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한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눴고, 중앙정부가 사라진 후, 루이나가 만든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 또한 막장 행정으로 민심을 얻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원래 콘스탄티노폴에 살던 이들도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루이나군의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한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총부리를 겨눴고, 중앙정부가 사라진 후, 루이나가 만든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 또한 막장 행정으로 민심을 얻지 못했다.
4.2. 철군기 [편집]
군사잡지 플래툰의 종군기자인 태상호 기자가 2006년 플래툰 컨벤션에서 꺼낸 말에 따르면, 당시 루이나군도 철군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으나 자신들이 치안을 박살내 놓았고, 주변국의 '자유의 투사'들까지 루이나군을 잡으러 온 상황에서 손을 빼면 정말로 개막장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 철군을 하고 싶어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냥 있자니 주위 놈들은 죽여도 시원찮은 침략자 취급하고, 그렇다고 그냥 손털고 나가면 지옥이 펼쳐져서 국제적으로 욕 퍼먹을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자이툰에 한국군이 파병나가기 전 루이나군과 함께 이동하며 인터뷰하던 한국 기자가 "한국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라는 말을 하자 루이나군 병사가 기쁜 목소리로 "언제 오는가?" 하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국기자가 "한국군이 와도 그냥 평화유지군이고 전투병 파병은 어려워보이는데?"라는 답변을 하자 무척 실망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전쟁에, 재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관계로 루이나군이 도입을 준비중이었던 UH-60 초기모델을 공동구매하는 것도 무산되었다. 결국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전선 확대가 결국 루이나군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콘스탄티노폴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루이나 행정부는 이듬해 7월부터 루이나군 병력이 콘스탄티노폴에서 일제히 철수해 교외로 병력을 돌렸고, 1970년 10월 12일, 마지막 전투부대가 떠났으며 참모단과 훈련단은 1971년까지 주둔 후 철수 했다. 9월 1일, 리처드 잭슨 대통령이 콘스탄티노폴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루이나군이 나간다고 해결될 수 없는 상태였다. 전부터 치안유지 능력이 심각하게 의심되던 콘스탄티노폴 신정부군과 경찰은 한술 더 뜬다.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 경찰에 지급한 권총이 며칠만에 암시장에 풀리고, 심지어 국내 방산업체가 수출한 AR-15 소총도 암시장에서 팔리며 IS가 AR-15에 광학장비를 달고 행진하는 모습도 확인되었다. 콘스탄티노폴의 군/경찰/민병대에 입대했다가 무기를 든 채로 탈영후, 콘스탄티노폴군이나 경찰의 제복을 입고 갱단세력에 합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일 정도였다.
결국 어느 정도 자치정부가 안정세를 보이는 듯하다가 계속되는 무장세력간 갈등과 정정불안,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지옥구덩이에 들어가고 말았다.
자이툰에 한국군이 파병나가기 전 루이나군과 함께 이동하며 인터뷰하던 한국 기자가 "한국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라는 말을 하자 루이나군 병사가 기쁜 목소리로 "언제 오는가?" 하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국기자가 "한국군이 와도 그냥 평화유지군이고 전투병 파병은 어려워보이는데?"라는 답변을 하자 무척 실망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전쟁에, 재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관계로 루이나군이 도입을 준비중이었던 UH-60 초기모델을 공동구매하는 것도 무산되었다. 결국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전선 확대가 결국 루이나군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콘스탄티노폴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루이나 행정부는 이듬해 7월부터 루이나군 병력이 콘스탄티노폴에서 일제히 철수해 교외로 병력을 돌렸고, 1970년 10월 12일, 마지막 전투부대가 떠났으며 참모단과 훈련단은 1971년까지 주둔 후 철수 했다. 9월 1일, 리처드 잭슨 대통령이 콘스탄티노폴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루이나군이 나간다고 해결될 수 없는 상태였다. 전부터 치안유지 능력이 심각하게 의심되던 콘스탄티노폴 신정부군과 경찰은 한술 더 뜬다. 루이나가 콘스탄티노폴 경찰에 지급한 권총이 며칠만에 암시장에 풀리고, 심지어 국내 방산업체가 수출한 AR-15 소총도 암시장에서 팔리며 IS가 AR-15에 광학장비를 달고 행진하는 모습도 확인되었다. 콘스탄티노폴의 군/경찰/민병대에 입대했다가 무기를 든 채로 탈영후, 콘스탄티노폴군이나 경찰의 제복을 입고 갱단세력에 합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일 정도였다.
결국 어느 정도 자치정부가 안정세를 보이는 듯하다가 계속되는 무장세력간 갈등과 정정불안,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지옥구덩이에 들어가고 말았다.
4.3. 콘스탄티노폴 내전 [편집]
콘스탄티노폴 내전은 1970년 루이나군의 철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정부 상태의 장기 내전이다. 루이나의 침공과 점령, 이후 무리한 철군 과정에서 발생한 권력 공백과 치안 붕괴로 인해 수십 개의 무장세력, 갱단, 민병대, 자경단 등이 도시 곳곳에서 각축전을 벌이며 촉발되었다. 루이나군이 철수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 자치정부는 급속히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경찰과 군부는 무기와 장비를 갖춘 채 갱단에 합류하거나 탈영하여 무장세력이 되었고, 루이나가 제공한 군수품과 무기 상당수가 암시장에 흘러들어갔다. 특히 루이나군이 버리고간 M67 무반동포등과 같은 고성능 화기가 풀려버리며, 일개 민병대가 중대급 화력을 보유하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바생하였다. 이 무기들이 시가전에 사용되며 도시 내 민간인 피해가 급증하였다.
오로지 민간인만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정기적인 전기 공급은 끊긴 지 오래고, 병원은 무장조직이 병사들을 위한 사병 클리닉으로 점령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갱단의 아지트에서 총기를 조립하는 법을 먼저 배웠고, 하루 세 끼가 아니라 하루 한 끼라도 먹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날로 여겨졌다.
도시는 명목상 자치정부가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구역별로 나뉜 무장세력의 군벌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들 세력은 마약 밀매, 무기 거래, 인신매매, 강도, 납치 등을 일삼았고,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경단과 민병대는 각자 자신들의 구역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강제징집, 보복 살인, 무차별 검문을 일상화하였다. 전통적인 국가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은 국제사회로부터도 ‘실패한 도시’로 평가받았으며, 유엔이나 주요 국가들도 평화유지군 파병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로 인해 도시 내부의 상황은 외부에서 거의 통제할 수 없었으며, 수십 년에 걸쳐 범죄와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장기적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은 세계적으로 최악의 치안 불안 지역 중 하나로 분류되며, 범죄, 분쟁, 무력 충돌이 일상화된 도시로 기록되고 있다.
오로지 민간인만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정기적인 전기 공급은 끊긴 지 오래고, 병원은 무장조직이 병사들을 위한 사병 클리닉으로 점령했다. 아이들은 학교 대신 갱단의 아지트에서 총기를 조립하는 법을 먼저 배웠고, 하루 세 끼가 아니라 하루 한 끼라도 먹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날로 여겨졌다.
도시는 명목상 자치정부가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구역별로 나뉜 무장세력의 군벌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들 세력은 마약 밀매, 무기 거래, 인신매매, 강도, 납치 등을 일삼았고,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경단과 민병대는 각자 자신들의 구역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강제징집, 보복 살인, 무차별 검문을 일상화하였다. 전통적인 국가 질서가 붕괴된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은 국제사회로부터도 ‘실패한 도시’로 평가받았으며, 유엔이나 주요 국가들도 평화유지군 파병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로 인해 도시 내부의 상황은 외부에서 거의 통제할 수 없었으며, 수십 년에 걸쳐 범죄와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장기적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은 세계적으로 최악의 치안 불안 지역 중 하나로 분류되며, 범죄, 분쟁, 무력 충돌이 일상화된 도시로 기록되고 있다.






